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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입니까? What is justice?


2014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던 홍모 이단 교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그녀의 주장에, 그녀를 따르던 사람들은 재산을 다 팔고 해외이주하는 소동이 벌어졌었지요. 이런 모습은 1967년 있었던 이스라엘의 6일 전쟁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조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전쟁의 소식이 들리자 전 세계에 있던 유대 청년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고자 해서 이스라엘로 들어갈 비행기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국민들의 태도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의 네 나라를 상대하는 이 전쟁에서 6일 만에 승리를 거두고 영토까지 확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현재 미국의 최첨단 기업들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국의 작은 스타트업들이 성공할 수 있게 돕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정의 개념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의 개념은 잘난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공로 정의(meritorious justice)의 개념을 뛰어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살 길을 보장하고 배려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으니 그들은 필요적 정의(need-based justice)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디서 이런 태도를 배웠을까요? 당연히 성경(토라)입니다. 성경에는 히브리어 미쉬파트 (공평, 판결 judgement מִשְׁפָּט)와 째데크 (정의, righteousness צֶדֶק)라는 두 가지의 정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미쉬파트는 보복적 정의입니다. 힘이 아닌 법에 따른 판결입니다. 법에 따르면 무죄와 유죄가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미쉬파트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은 우리의 공로 performance와는 상관 없이 주어지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것은 재판관이 중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사형에 언도한 후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나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배려하시고, 그 배려가 또 다른 정의, 곧 째데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헤세드(변하지 않는 사랑) 때문에 째데크가 가능하다고 할까요? 미쉬파트와 헤세드를 합치면 째데크가 된다고 할까요?


미쉬파트에 의하면 이 세상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허락하시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의는 미쉬파트적인 의가 아니라 째데크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째데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 받을 수 있는 것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째데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쉬파트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째데크를 통해 그 분을 믿는 자마다 그 분의 의를 전가받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이루신 째데크를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그 분의 평화가 임하니 성경은 그것을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소개하고 함께 따르는

호수교회 김철규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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